아스라한 얼굴들
난 청파동에 소재한 청파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니 나만 다닌것이 아니다.
막내 오빠, 외사촌 언니, 사촌 오빠, 우리 언니, 동생, 사촌 동생등
하여튼 학년마다 우리 친가, 외가 형제들이 몽땅 다 그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학구제인가 그런 제도가 생겨 사촌 형제들은 효창 국민학교로 옮겼다.
지금 그 효창 국민학교는 없어지고 청파 국민학교는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살던 숙대 입구의 집에서 청파동 꼭대기에 위치한 그 학교는 어른 걸음으로도
솔잖은 거리인데도 모든 형제가 다니니 왜 그 먼곳을 다니냐는 의문도 없이
우린 그냥 그 학교를 다녔다.
교문을 나서서 왼쪽으로가 청파동인 관계로 그 동네에 학급 친구들이 많이 살았고
오른쪽으로 틀면 친구들이 사는곳과는 반대 방향이 되며
그네들이 사는 곳과는 점 점 멀어지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친구도 드물었고 정보도 한발씩은 늦었다.
시간을 재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때 우리 걸음으로도 50여분 정도는 걸리지 않았을까?
더 걸리면 더 걸렸지...
학교를 등교하면 숙명여대 학생들이 죽 옆으로 늘어서 가면
뒤따라가면서 저 학생의 다리는 좀 굵으네 저 학생은 예쁘네
저 여학생의 스타킹의 줄이 삐뚤어 졌네(그때는 씸레스 스타킹이라고
가운데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후 줄이 없어진 스타킹이 나오면서 신은것 같지 않다는둥
신지 않은 것같아 상스럽다는둥 말도 많더니). 저 구두는 예쁘네
나도 크면 저런거 신어야지 하면서 심심치는 않았다.
그때 여대생이 제일 많이 신고 다니던 신발이 하얀색 단화인데 끈을 매는 부분에는
갈색의 가죽으로 처리가 되어 있어 멋져 보였다.
나도 크면 기필코 저 신발을 신어야지 했는데 내가 다 커서 그 신발을 신을때쯤
그 신발은 유행의 뒷자락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가늘고 뾰족한 구두에는 쇠굽을 박아 그 아스팔트 길에 소리도 요란하여
말들도 많았었는데,
다 추억의 뒷안길에서나 열어 볼 수 있는 유년의 기억이다.
집에서 출발하여 숙명여대를 바라 보며 걷다가 수녀원(자그마한)못미쳐 오른쪽으로
꺽으면 감나무 동산이 나타난다.
그 감나무 동산은 이름 그대로 감나무가 많았고
동산처럼 얕은막한 언덕배기 사이로 냇물도 졸졸 흐르곤 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감나무에서 조그마한 감들이 떨어지면 줏어 길게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곤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고
아무튼 운치가 흘렀던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
학교 가는 길에 한집에 들러 그 친구와 같이 가곤했다.
1.
그 친구의 아버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다.
긴 갈색의 코트에 가방을 들고 다니시던 그 선생님의 존함이 박**이셨다.
학교 가자하고 불르면 그 친구는 전날 공책에 만화를 그려 놓았던 것을
가져다 주면서 읽어 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날은 자기가 직접 읽어 주기도 했다.
그 노트에 그린 그림이며 전개되는 줄거리가 지금은 다 잊었지만
제법 그럴싸 했던 것같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얼마후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이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그 분의 프로필이 나오고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만화를 잘 그리던 그 친구의 언니임이,
역시 피는 못속이는 구나
그 단발 머리에 슥슥그리던 만화 솜씨가 역시나...
2.
우리와 다르던 용모의 소유자
우리와는 다른 사이즈의 머리크기 얼굴크기 머리색갈
그아이는 혼혈이었다.
눈동자의 색도 달랐고
그아이가 입은 우리와 똑같은 쉐터, 바지등은 왠지 어울리지도 않았고 겉돌았다.
그녀가 어디 사는지 어떤 환경인지는
친구들이 사는 동네가 너무 먼탓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아이들이 줄기차게 놀렸고
그아이는 별 말이 없었다는것.
그아이가 주황색의 쉐터에 머리는 말꼬랑지 처럼 매고 다녔고
저 아이는 학교 다니는 것이 죽을 만큼 싫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몇년이 흐른후 신문에 어는 혼혈여인이 자기의생활을 수기로
써서 발표한 광고의 사진은
바로 그아이였다.
검정 드레스에 비스듬히 누운듯한 자세의 그녀는 애니라는 애칭으로
간단한 세월의 흔적을 소개하며 책을 발간하여 내 앞에(신문의 광고로)나타났다.
늘 그녀를 놀리는 아이들을 한번도 제지하지 못한것이 미안했던 나는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며 미안했다 라는 어울리지 않은 감상에 젖어 보았다.
3.
효*이라는 이름뿐이 기억이 나지 않은 아이
오락시간이면 어김없이 불려나와 노래를 한번도 사양하지도 않고 부르던 아이.
그 아이는 사는 형편이 좀 그랬는지
그 당시에 별로 입고 다니지 않는 무릎정도에 오는 통치마와 흰저고리를 입고
다녔고, 공책은 시험지(갱지)를 묶어 줄을 그어 공책으로 대신 사용했는데
그 공책이 어찌나 멋있어 보였던지
그 아이는 그런 매무새나 그런 공책이 하등 하나도 문제될것이 없이
당당했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예뻐 보였는지도.
그 아이가 나와서 부르는 노래는 나중에 알고 보니
단장의 미아리 고개였다.
그 노래는 1절을 다 부르고 2절 들어가는 사이에 가수의 독백이 들어 가 있는데
이 아이는 그 구절을 떨림도 없이 막힘도 없이 매번 구슬프게 잘도 외우고
잘도 불렀다.
그 어린나이에 그 노래가 주는 의미인들 알고 불렀겠냐만
지금도 라디오에서 그 노래의 독백부분이 나오면 동그마한 하얗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4.
나**라는 아이
그녀의 아버지는 Y 대학의 교수셨고 어머님은 그 당시에 유치원을 경영하셨다.
그 유치원 이름을 남편과 본인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지어서 유명했고
그 아버님은 가곡도 작곡하신 유명한 분이셨다.
소풍을 가는날
그 어머님은 회색바바리에 카라는 자주색인 지금생각하면
뒤집어서도 입을 수 있는 그런 옷인듯.
머리에는 그 바바리 천으로 삼각 수건을 만들어 가뿐하게 묶고
그 당시에 찦차를 타고
우리가 단체로 타고 가는 버스튀를 따라 오시더니
여흥시간에 유치원을 경영하는 솜씨로 우리를 멋지게 데리고 놀아 주셨다.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깊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오래동안 그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고
자꾸 집에 오랜동안 편찮으신 몸으로 우리의 하교를 기다리는 어머님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어서 그랬는지...
5.
송**
이름은 기억도 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 학교는 1-4학년까지는 남녀 같은 반이었고
5-6학년때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반을 갈랐다.
4학년때 벌써 깔끔한 차림의 남자 아이들이 눈에 들어 왔다면
조숙한 것일까?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먹는 동안
동요를 틀어 주는데
송아지라는 노래가 나오면
이 송**라는 아이는 밥먹다 말고 교실 밖으로 쏜살 같이 뛰쳐 나가는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짖궂게 놀리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얼굴이 복스럽기도 하고 귀염성도 있어서
남자아이들의 놀림의 대상이었지
그 아이가 못생기고 쳐다볼 여지가 없는 아이라면 그렇게 놀리지도 않았겠지.
집안이 유복했고 공부도 뒤쳐지지 않은 남학생들
그때 그런아이들의 옷이 하나같이 곤색의 상의에 카라는 둥굴게 만들고
꼭 흰카라를 달았다. 금속의 단추를 6-7개를 달았으며
가을이면 반 바지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단정하게 보이도록 목 부분은 꼭 여미게 만들어 척보면 모범생의 차림이었다.
그 중에 특히 유**라는 아이가 아주 잘생겨 마음에 두었다면...
6.
윤 뭐라고 부르는 아이의 어머님은 기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글쎄 그 아이의 어머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으신것 같기도 했다.
학교에도 자주 왔었고 그 아이는 고전 무용을 배워 가끔 그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 어머니가 오시는 날은
하얀 분칠(그분 얼굴이 하햫기도 했다)에 하늘빛보다는 조금 더 밝은 색의 한복치마에 하얀 저고리
에 소매끝에는 자주색으로 끝동을 장식한 정갈한 차림으로
넓은 숄을 두르고 그 치마 만큼이나 선명한 연두빛이 도는 옥비녀를 날렵하게
쪽머리에 차리고 오셨다.
그 치마의 색이 얼마나 고왔는지
모든것이 우중충한 시대에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40년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