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습작 묘미 3

저녁 바람 2020. 5. 21. 05:54

내가 그를 만난 건

2학년 봄

학교 운동장으로 버드나무의 솜털이 눈송이처럼 날리던 5월

난 길고도 긴 질김의 인연을 만나러 새로 결성된 한 동아리 모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친해 있었고

내 온 촉각은 그를 향해 열려 있었다

어느 시간대에 그가 그 동아리 모임의 교실에 온다던가

이런 것은 누가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이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그리고 온 정신을 그에게 쏟고 있다 보니

알게 모르게 그의 이야기는 걸러지고 보태지고 걸러지고 보태져서 내 귀에 쫑긋거리지 않아도 착착 쌓여만 갔다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가 안 보이면 허전하고 보이면 반갑고​

그의 고향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정도가 걸리는 섬유의 고장.

6남매의 2번째라는 것

그리고 웬만큼 사는 집안이라는 것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입고 다니는 옷차림이 우선 대신 말을 해 주었다

그 당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가세의 남학생들이 많음 속의 그는 단연 돋보였다

하얀 얼굴이 그랬고

하얀 바탕에 녹색 무늬의 남방이 그랬다

회색빛의 윤기 흐르는 양복에 빨간색의 티셔츠가 말해 주었다

언젠가 그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넉넉함을 갖고 있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이 싫다고

그건 나 역시 그랬다

부지런한 부모님 덕에 그 당시로서는 많은 부를 누리며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쩌다 바지 속의 양말이 짝짝이임을 보았던 남학생들의 부실함이

싫었다

매일 똑같은 회색 빛 잠바 차림.

차 한 잔도 아주 편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낭만들이 싫었다

그중에 그는 달랐다.

같은 과의 여학생이

담배를 사러 나온 그를 향해 값을 대신 치러 달라는 제스처를 쓰면서

빵을 집어 들어도

그에게 가 아니면 가능할 수 없는 억지였다

그 유연함을 난 좋아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 줄기처럼 늘 다변이고 달면인 언변조차도 잘 흐르는 강물 같았다

학비를 겨우 만들어 학교를 힘겹게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차 한잔 편히 마시지 못한 그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서 그와 나는 별세계 사람 같았다

스타킹에 줄이 가면 가차 없이 버리고 늘 어딘가 경쾌한 발걸음의 나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겠지

그건 좋아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냥 자기 뒤에 여자 하나 줄을 세워 놓는 것 같은 것인데...

우리는 같은 학년이라는 어떤 동지적인 성격과 행동이

약간의 결속을 가져다주기도 하였고

그도 이런저런 내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 늦도록까지 강의 실에서 이야기도 나누었고

야유회 뒤끝에 살짝 둘이만 내려 영화 감상도 했었다.

교내에는 학생들 데모가 끊이지를 않았고 우린 예기치 않은 방학을 맞이했다

갑자기 교문은 굳게 닫히고 모임의 그 누구와도 방학 잘 보내라는 인사도 없이 방학으로 들어갔다

학생은 그 누구도 학교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과의 연락차 과 대표를 만나러 가는 학교 앞 그 뜨거운 한낮

큰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는 그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나게 한 신의 섭리는 무엇인지... 그 섭리에 나는 지금도 굴복할 수가 없다

그때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장래의 시간은 달라졌을까?

그는 예상치도 않던 나의 만남에

" 보고 싶어 어떡허지?" 편지할게.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인사가 그냥 우리 친구들과 헤어질 때 그래 또 연락해 만나자 이 정도의 인사인 것을

나는 그의 편지가 소리 없이 떨어지기를 40여 일 방학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오지 않은 편지를

40여 일 내내 편지를 기다리면서 그의 모습을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해가 지는 저녁 으스름 이면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미세한 창문의 흔들림에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거리를 거닐어도

친구와 차 한 잔을 마주 하면서 나는 늘 그와 같이 있었다

그후에도

그와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도 그의 안부는 항상 그리움과 같이 했다

방학이 끝나고 치르지 못한 1학기 말 시험 차 도서관에 있는 내 얼굴에 누군가의 시선이 꽂혀 간질간질하여 쳐다본 곳에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그가 나를 계속 보고 있었음을

마음속에 요동칠 만큼 반가움인데 왜 나는 머뭇거렸을까?

아마 나는 내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났었나 보다

그는 쳐다보는 나에게 반색을 하며 다가와 점심을 사 주겠노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물었어야 했다

왜 편지한다고 하면서 안 했느냐...

그러면 나 나름대로의 매듭이 지어졌을까?

난 그런 질문은 내 스스로의 자존심의 웅덩이를 파는 것 같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었다

개나 물어갈 자존심

그 후로 그는 끊임없이 무엇무엇을 약속했지만 지켜진 것은 없었다

사회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였다

달력이 나왔다 주소 불러 봐라

이쁜 저금통이 있다 보내줄게

전기인두가 있다 보낼게

심지어 여름이면 너 휴가 안가냐? 휴가비 좀 보태 줄까? 통장 번호 불러 봐라

한 번도 그는

정말 한 번도...

내가 달라고도 하지 않고 무엇을 원하지도 않은데 왜 그는 그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그럼 왜 물어 보지는 않았을까?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고 싶었나?

그런 잡다한 것에는 마음이 없다, 나는 그저...너만 있다면 ...아마 그런 마음이었겠지.

내가 그의 감정적인 비빌 언덕이었나?

한 번도 물어 보지 않은 내 마음도 의문이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나는 그와 은밀한 관계이고 싶었다

그 당시의 은밀함이란 고작 말해야 동아리 모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차도 마시고 영화 구경하는 정도의 그런 관계이고 싶었을 뿐이다

참다못한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고

흐름은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가주지를 않았다

난 그날 낮에 동기 여학생에게 너무 은근하게 밥 먹었느냐고 묻던 그의

본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난 그 여학생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과 그다음에 이어질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열어줄 것을 기대했는데

그 여학생에게 보여준 그 마음이 어떻다는 것보다 그런 것을 묻는 나의 마음조차 헤아리기는커녕

그는 내가 그에게 그 어떤 특별한 마음을 표시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왜 그는 내 마음을 몰랐을까?

그 떼 뒤늦게 스치고 지나가는 내 행동들

좋아한다는 감정을 들킬까 그의 말에 부드러움보다는 반격의 날을 세웠던 행동들이...

그는 전혀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 외에는 없노라고 했다 ​

나는 뜨거운 감자이던, 공이든 간에 그에게 넘겨 주었다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는 어쩌면 내게 잘못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나에게 말했던 것, 행동했던 것등은 특별한 것이 아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하는 늘상의 대화였는데

내가 곡해 했던것

위로 남자 셋의 오빠 밑에 실없는 허투가 용납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가 다른곳에서도 가능한줄 알았다는것이

실수라면 실수일까?

모임에서 야유회 간 날도 그는 바로 옆자리의 다른 대학에서 온 이쁜 여학생과 눈 맞추고 있었음을

그리고 우리는 서먹해졌다

우정이 애정으로 변할 수 없듯이 나 역시 애정이 우정으로 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리고 수없이 부딪치고

끝나지지 않은 그와 나의 작태

그건 작태라고 뿐이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먹해진 중간에도 그는

집 근처라고 차 마시자는 전화에 나간 자리에는 후배와 같이 앉아 있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고​

군에 간다고 연락하고

군에서 휴가 나왔다며 창경원에 곰을 보러 가자고 불러 내기도 하고

서울 왔다고 만나고

그 후

길거리에서 만난 그의 여자는 내게 그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그는 어딘가에 잠적했다는 말인가?

그녀의 주술처럼 열리던 말들.... 결혼 약속까지 했다면서 왜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단 말인가?

허긴 그가 사귄 여자가 한 둘인가? ​

그리고 연락이 두절됐다.

만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깜깜히 몇 년이 흐른 후

우연히 어디서 주워들은 그의 소식 끝에 닿은 연락처

얼마나 망설이고 가슴은 뛰고 떨기까지 하면서 걸었던 전화

그의 부재를 알고 도리어 맘 편했던 시간

뒤미처 걸어준 그의 전화는 너무도 달콤했다​

그는 참 반가워 해 주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주저주저하며 그의 결혼을 전했으며 곧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섭섭한 마음이 밀려옴과 동시에 그 무언가 숙제를 끝낸듯한 편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젠 나 혼자만 걸어야 할 길이 둘이 같이 걸어가자고 조를 때 보다 훨씬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난 사실 그와 결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뒤늦은 형제들이 결혼, 행복하지 않은 가정사들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온갖 것을 다 보이며 살 자신도 없었고

그냥 나는 그를 좋아했다는 그것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전화 연락을 해 주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에게 슬쩍 무엇인가 묻는 것처럼

뭐 하노?

그냥 해 봤다.

그 두 마디뿐인 대화 일지라도 한 주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3~4번은 기본이었다

뭐하나 전화해 봤다며 한숨 비슷한 것으로 곧 끊는 날은 그 말 끝에 뭔지 그의 일상이 잘 안돌아 가고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우린 무슨 3차원의 세계를 사는 양 서로의 생활에는 일절 말을 섞지 않았다

잘 지내냐?

응 그냥.....

내 생각에는 그가 나에게

이야기해줄 거리가 있다면 물어보지 않아도 이야기해줄 것이고

이야기해줄 거리가 없다면 물어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그의 성격이기에

그러면서

나는 그도 결혼을 했으니 생활인이어야 하는 일번론적인 한 집안의 가정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냥 학교때 보던 자신만만했고 여유자적 구름위에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대감댁 도련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마 초등생들이 선생님 화장실 가는것도 용납이 안 되는 그런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구름 위에 한적한 모습으로 느긋한 나날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 역시 생활이라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가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는 남자이고

자기 부인한테 바가지라는 것도 긁히면서 살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그러니 그런 일상을 살고 있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 했던 사람이고 이 세상 어딘가에도 없는 사람이 남들과 똑같이 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생활이 그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 조차 이해하지를 못했다

나 역시 그때까지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실적인 문제는 동댕이치고 그저 꿈 많던 시절 만난 그 감정이 때 묻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

생활이 무엇인지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까지도 인식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직장이라는 것이

3년 간격으로 이동이 있었다

서울에서도 있었고 수원 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는 영업 파트에서 그 분야 책임자인 자리까지 올랐다

서울에 있던 3년간 참 자주도 만났다

그냥 만났다

360도로 퍼지는 실크 후레아 스카트에 눈송이 처럼 하얀 실크 블러우스를 입고

겨자색의 코트에 붉은 색과 자주색이 섞인 corsage 를 달고

진한 갈색 boots를 신고 그를 만나는 날의 환희는 무엇에 비길까?

이쁜 등이 길게내려있던 찻집에서 차 마시고 그 정도의 만남이기만 했어도 좋았었다

​또 어느 날 아침은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네가 너무 밉다 하는 말과 많은 욕을 퍼붓고 끊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어쩌다전화를 해 주면 난 그 자리에서 숟가락을 놓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벅찬 감정에

도저히 더는 밥을 먹지 못했다

만나서도 그랬다

그와 마주하면 공복일 수 밖에 없었고

무엇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게 넌 나와 살면 까시가 되겠다 ..

그랬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