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풍경
감자
저녁 바람
2012. 1. 5. 22:44
감자 (1)
오후 1시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후 7시쯤 닿는 곳에 잠시 머문적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어스름 저녁이면
기왓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짓는 굴뜩의 연기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 반갑다고 손을 막 흔들어 줄것같은
그런 정겨운 곳을 지나다 보면 어느덧 종착역인 서울역이 가까워 온다.
짐 정리하라는 멘트와 내고향으로 날 보내주 라는 음악이 나오면
왜 그렇게 콧끝이 찡했던지...
집으로 들어서면
맛있는 저녁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 식성에 맞추어 어머님은
달걀반찬,외 몇가지를 준비하시면서 빠트리지 않는 음식하나.
우리는 그 반찬을 감자채라고 불렀다.
감자를 약간 굵게 채썰어 물에 잠시 담가 둔다.(소금물에 담그기도 한다)
물을 따라 버리고 자작하게 물을 붓고 끓인다.
사각거릴 정도로만 익으면 불을 끄고 물을 따라 버리고
고추가루, 파, 깨소금,참기름을 넣고 그릇채 흔들어 양념이 고루 섞이게 한다.
설명 그대로 별 특별한 맛이 있는것이 아닌데
하여튼 난 너무 잘 먹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생일에도
먼 곳에서 돌아 오는 나의 밥상에 이 반찬은 빼놓은적이 없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호품하나 옥수수를 밥 보다 더 좋아했다.
그래서 오빠들은 이 소탈한 내 식성에 한마디
넌 어째 미국에서 가축이 먹는 사료만 좋아하느냐고....놀리곤 하셨다.
감자 (2)
세상 뜨시기 한해전 아버님은 휴양차 해인사에서 여름 한달을 쉬신적이 있으셨다
그 * * 암은 본절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고
그곳은 고시생들이 고시 공부를 하는 암자로도 유명해 있었다.
그 고시생들이 묶는곳은 윗채였는지 난 보지도 못했지만
그 * * 암에는 밥해주는 보살 그리고 그 보살의 아이 하나와 한 아이가 더 있었고
청년 중이 하나 더 있으며 밭일을 봐주는 나이드신 아저씨 이런 식구였던것 같다.
주지 스님과 두 아이가 저녁이 깔리는 즈음이면
불당에 촛불 켜고 스님은 목탁을 치고 아이 셋은 불경을 외웠다.
그럼 어쩌다 고시생이 신발 벗고 들어가 절하는 모습도 종종 불수 있었다.
어스름 저녁에 들리던 아이들의 청아한 목소리는
그 아이들 환경때문이였는지 난 매일 구슬프게만 들렸다.
스님이 외출하는 날이면 아이들과 방학숙제도 같이 들여다 보고
장기도 두곤했다. (난 이렇게 준비된 wife 감이었는데 : 남편과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려고..
다 배웠는데, 사실 배운게 아니고 사촌들과 어울리다 보니 ...)
스님이 늦게 귀가해도 아이들과 청년 중은 해지는 저녁이면 빠트리지 않고 그 예를 올렸다.
그 산골에 무슨 특별한 반찬이 있었을리가,
집에서 준비한 반찬과 밭에서 뜯는 신선한 푸성귀가 약이라면 약일까?
근데 이런 횡재가,
어느날 밥상에 오른 반찬중 한가지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진 알 감자 몇알이 간장에 담긴채 날 반기는게 아닌가
객관적으로 별 맛은 아닌데
조청을 넣어 조린 간장에 오랫동안 담구어져 있어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진 감자가
왜 그렇게도 맛이 있던지..
그래서 그 밥짓는 보살은 내가 그 반찬을 좋아한다고 매일 밥상에 올려 주었다.
지루하다고 동생과 교대하는 이 둘째딸
버스 정류장에서 (대구로 나가는 버스)전송하시며
마음아파 하셨노라는 이야기 나중에 들었다.
많이 약해지신 탓이셨는지
왠지 못볼것 같더라고.
예감을 하신걸까
그 다음해 7월에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한 10여년이 흐른후
동생과 그 해인사를 다시 찾았을때
너무나 변한 해인사를 보고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웅전 입구 기둥에 매달린 공중전화
절 입구에 만들어진 수세식 변소(조금 기억이..)
왜냐면 그 변소 앞에서 어떤 등산객 둘이 라면을 끓여 먹는것을 보고
냄새가 나는 재래식이라면 거기서 식사를 할리가...
그리고 새벽 4시쯤이면 그 청년 중이 방마다 문 앞에서 뭐라고 경을 읽는다
우리는 그냥 잠자면서 새벽마다 잠 설치게 한다고 투덜 거렸는데
젊은 중이 그렇게 경을 읽으면 문을 열고 같이 합장해야 된다나 뭐라나
오후 1시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후 7시쯤 닿는 곳에 잠시 머문적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어스름 저녁이면
기왓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짓는 굴뜩의 연기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누군가 반갑다고 손을 막 흔들어 줄것같은
그런 정겨운 곳을 지나다 보면 어느덧 종착역인 서울역이 가까워 온다.
짐 정리하라는 멘트와 내고향으로 날 보내주 라는 음악이 나오면
왜 그렇게 콧끝이 찡했던지...
집으로 들어서면
맛있는 저녁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 식성에 맞추어 어머님은
달걀반찬,외 몇가지를 준비하시면서 빠트리지 않는 음식하나.
우리는 그 반찬을 감자채라고 불렀다.
감자를 약간 굵게 채썰어 물에 잠시 담가 둔다.(소금물에 담그기도 한다)
물을 따라 버리고 자작하게 물을 붓고 끓인다.
사각거릴 정도로만 익으면 불을 끄고 물을 따라 버리고
고추가루, 파, 깨소금,참기름을 넣고 그릇채 흔들어 양념이 고루 섞이게 한다.
설명 그대로 별 특별한 맛이 있는것이 아닌데
하여튼 난 너무 잘 먹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생일에도
먼 곳에서 돌아 오는 나의 밥상에 이 반찬은 빼놓은적이 없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호품하나 옥수수를 밥 보다 더 좋아했다.
그래서 오빠들은 이 소탈한 내 식성에 한마디
넌 어째 미국에서 가축이 먹는 사료만 좋아하느냐고....놀리곤 하셨다.
감자 (2)
세상 뜨시기 한해전 아버님은 휴양차 해인사에서 여름 한달을 쉬신적이 있으셨다
그 * * 암은 본절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고
그곳은 고시생들이 고시 공부를 하는 암자로도 유명해 있었다.
그 고시생들이 묶는곳은 윗채였는지 난 보지도 못했지만
그 * * 암에는 밥해주는 보살 그리고 그 보살의 아이 하나와 한 아이가 더 있었고
청년 중이 하나 더 있으며 밭일을 봐주는 나이드신 아저씨 이런 식구였던것 같다.
주지 스님과 두 아이가 저녁이 깔리는 즈음이면
불당에 촛불 켜고 스님은 목탁을 치고 아이 셋은 불경을 외웠다.
그럼 어쩌다 고시생이 신발 벗고 들어가 절하는 모습도 종종 불수 있었다.
어스름 저녁에 들리던 아이들의 청아한 목소리는
그 아이들 환경때문이였는지 난 매일 구슬프게만 들렸다.
스님이 외출하는 날이면 아이들과 방학숙제도 같이 들여다 보고
장기도 두곤했다. (난 이렇게 준비된 wife 감이었는데 : 남편과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려고..
다 배웠는데, 사실 배운게 아니고 사촌들과 어울리다 보니 ...)
스님이 늦게 귀가해도 아이들과 청년 중은 해지는 저녁이면 빠트리지 않고 그 예를 올렸다.
그 산골에 무슨 특별한 반찬이 있었을리가,
집에서 준비한 반찬과 밭에서 뜯는 신선한 푸성귀가 약이라면 약일까?
근데 이런 횡재가,
어느날 밥상에 오른 반찬중 한가지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진 알 감자 몇알이 간장에 담긴채 날 반기는게 아닌가
객관적으로 별 맛은 아닌데
조청을 넣어 조린 간장에 오랫동안 담구어져 있어 쪼그라질대로 쪼그라진 감자가
왜 그렇게도 맛이 있던지..
그래서 그 밥짓는 보살은 내가 그 반찬을 좋아한다고 매일 밥상에 올려 주었다.
지루하다고 동생과 교대하는 이 둘째딸
버스 정류장에서 (대구로 나가는 버스)전송하시며
마음아파 하셨노라는 이야기 나중에 들었다.
많이 약해지신 탓이셨는지
왠지 못볼것 같더라고.
예감을 하신걸까
그 다음해 7월에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한 10여년이 흐른후
동생과 그 해인사를 다시 찾았을때
너무나 변한 해인사를 보고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웅전 입구 기둥에 매달린 공중전화
절 입구에 만들어진 수세식 변소(조금 기억이..)
왜냐면 그 변소 앞에서 어떤 등산객 둘이 라면을 끓여 먹는것을 보고
냄새가 나는 재래식이라면 거기서 식사를 할리가...
그리고 새벽 4시쯤이면 그 청년 중이 방마다 문 앞에서 뭐라고 경을 읽는다
우리는 그냥 잠자면서 새벽마다 잠 설치게 한다고 투덜 거렸는데
젊은 중이 그렇게 경을 읽으면 문을 열고 같이 합장해야 된다나 뭐라나